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르키예 독립전쟁 (문단 편집) === 안텝 전쟁 === 튀르키예 남동부의 요충지 [[가지안테프|가지안텝]](Gaziantep)는 아이은탑(Ayıntap) 혹은 안텝(Antep)이라는 이름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오늘날 [[시리아]]의 [[알레포]](Halep)에 속해 있었으며 [[튀르크인]], [[튀르크멘인]],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거주하던 곳이었다. [[19세기]] 말 가지안텝은 [[프랑스]]와 [[미국]]의 선교사의 활동과 도시의 주생산품인 동과 밀, 카페트, 그리고 목화무역으로 유럽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때문에 남동부 아나톨리아에서는 '''동방의 [[파리(프랑스)|파리]]'''라는 별명도 붙을 만큼 드물게 서구식 교육시설과 병원을 갖추고 있었으며 주민들의 근대교육 수준도 높았다. 문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라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자 주민들 간에 민족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1918년]] [[12월 17일]]에 영국군은 가지안텝에 진입해 대략 1년 동안 군정을 실시했다. 하지만 1919년 영국과 프랑스는 협약을 체결해 시리아와 남동 아나톨리아의 위임통치권을 프랑스에게 넘겼고 같은 해 [[11월 5일]]에 프랑스군이 진입했다. 한편 1919년 초부터 도시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인근의 마라쉬(Maraş, 오늘날의 [[카흐라만마라쉬]]), [[킬리스]]의 아르메니아 주민들과 더불어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전쟁 시기 이 지역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강제 이주지로 설정된 곳이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이곳으로 이주한 '''반 오스만''' 성향이 배가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갑자기 늘자 원래 가지안텝에 거주하던 튀르크멘, 아랍, 쿠르드계 주민들과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과 연합해 독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군에 합류해 튀르크 민병대와 대치했던 아르메니아계 민병대의 구호는 "아르메니아가 아니면 무덤을!"(Ya Ermenistan, ya mecaristan!)이었다. 프랑스군은 오늘날 가지안텝 시립 박물관 및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는 베야즈한(Beyazhan)에 사령부를 마련했고 그 지역은 대체로 부유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근처에 미국 선교사가 세운 아메리카 병원과 [[아르메니아인]]을 위한 여학교가 있었다.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을 등에 업고 튀르크인들을 괴롭혔으며 프랑스군의 행동도 튀르크인들의 분노를 샀는데 결정적으로 이들이 봉기하게 된 계기는 이 베야즈한에 위치한 사령부 근처에서 벌어졌다. 1920년 1월 21일 금요일 저녁 당시 14세였던 메흐메트 캬밀(Mehmet Kâmil)은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베야즈한 앞을 걷고 있었다. 그때 근처를 순찰하던 프랑스군은 그들의 길을 막으며 캬밀의 어머니의 [[히잡]] 차림을 조롱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한 군인이 그녀의 히잡을 잡아채 떨어뜨렸다. 그러자 화가 치민 캬밀은 돌을 집어들어 그 군인에게 던져서 맞추었고[* 지금도 [[아랍인]]들에게 남아 있는 풍습이지만 여자의 히잡을 강제로 벗겨서 머리카락이 드러나게 하는 것은 그 여자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 대한 상당한 모욕으로 여겨진다. 캬밀은 그 모욕감 때문에 분노했고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돌을 던진 것이다.] 군인들은 캬밀을 총검으로 찔러 살해했다. 다음날 캬밀의 장례식에는 모스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분노한 안텝의 주민들이 많이 참석했고 이들은 집에 가지고 있었던 고물 엽총과 칼을 긁어모아 오스만 군대의 옛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당시 예멘 전선에서 싸운 참전용사 샤힌 베이(Şahin bey)와 마라쉬 출신의 카라 이을란(Kara Yılan)이 이들을 이끌었다.[* 때문에 가지안텝 도의 중심을 이루는 두개의 군의 이름은 안텝 전쟁의 첫번째 전사자인 캬밀과 봉기군을 지도한 샤힌 베이의 이름을 따서 각각 셰히트캬밀(Şehitkâmil), 샤힌베이(Şahinbey)가 되었다.] 1920년 4월 1일부터 1921년 2월 9일까지 샤힌 베이가 이끄는 300여 민병대는 그보다 10배는 되는 도시 내에 주둔한 많은 프랑스군과 아르메니아계 민병대를 상대로 농성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저지시켰고 인근 도시인 카흐라만마라쉬와 샨르우르파에서도 민병대들에 힘입어 프랑스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남동부 지방의 대프랑스 전선은 앙카라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가 신경써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때문에 이 전선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안텝 전쟁"(Antep Savaşı)이라고 따로 분리하기도 한다. 본 항목에는 소문단 형식으로 추가했다. 결국 프랑스는 [[1921년]] [[10월 20일]]에 앙카라 협약[* 시리아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튀르키예 남동부 지방의 국경선을 정한 협약으로 아직 [[하타이]] 지방을 프랑스령으로 남겨 놓았지만 이것도 [[1939년]]에 돌려받얐다.]을 체결하면서 제일 먼저 전쟁에서 빠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